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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세조에 대한 또다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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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세조에 대한 또다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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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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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조. 단순히 폐위에 그친 게 아니라 사약을 내려 죽인 것이 유력시되는 만큼 이런 인물에게 무슨 인간적인 면이 있나 싶겠지만, 세조는 의외로 가정적이고 의리를 지키는 남자였다고 한다.  

우선 대단한 애처가였던 점을 들 수 있다. 정실인 정희왕후 윤씨(훗날 자성대비)를 너무나도 아껴 다른 여자에게 눈도 돌리지 않았다. 당시 왕이 후궁을 들이는 건 딱히 나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으나 세조는 딱 한 명의 후궁만을 들였을 뿐이다. 이마저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첩으로 들인 사람이다. 신하들이 제발 후궁 좀 들이라고 말해도 본인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조의 후궁 이야기가 좀 흥미롭다. 이 유일한 후궁은 덕중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아들도 일찍 죽고 세조가 관심도 안주니까 외로워서 속이 터질 지경이 된다. 급기야 스캔들을 일으키니 첫 번째 대상은 송중이란 환관이었다. 몰래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왕의 후궁이 저지른 일인 만큼 궁궐은 발칵 뒤집히고 덕중은 첩지를 빼앗기고 무수리가 된다. 그런데 덕중은 사랑이 정말 고팠는지, 한 번 더 스캔들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좀 더 스케일이 커진다. 그 대상은 세조의 조카 구성군 이준이었다. 막장 드라마 같은 스토리 텔링이지만 엄연히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세조11년 9월 5일 ).  

결국 세조는 제대로 빡이 쳐서 덕중은 물론 그녀의 편지를 구성군에게 전달한 사람들도 사형시킨다. 사랑을 못 받은 덕중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세조는 술을 상당히 좋아했고 잔치도 많이 열었는데 잔치에는 으레 기생을 부르기 마련아다. 그런데 세조는 기생을 싫어해서 잔치에 참여하는 기생들은 하얗게 분칠을 시켰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반면 정희왕후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밖에 나갈 때도 항상 대동해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금슬을 칭찬했다. 정희왕후 역시 매우 현명한 여인이었다. 세조가 처가 쪽 사람을 등용할까 하면 인사의 공정함을 강조하며 반대했고 정책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세조가 국정을 논할 때 “집사람이 이렇다는데...” 같은 식으로 말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동시에 세조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세조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많은 공신들을 낙향시켰다. 그 과정을 보면 비열해보이기까지 하다. 반면 세조는 공신들을 우대했다.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양정이다. 양정은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를 죽이는 데 공을 세운 세조의 핵심인사였다. 문제는 이 사람이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양위를 종용했다는 것. 이에 세조가 ‘내가 언제 임금의 자리를 탐내던 사람인가?’라고 말하며 당장 양위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신하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대하고, 세자는 울고불고, 양정은 ‘임금의 명령이 이러하다’라고 말하며 양위를 재촉하고... 결국 상황이 정리되고 사건이 있은 지 나흘 뒤에 양정은 참수당한다. 

참고로 조선 역사상 신하가 왕에게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말을 한 게 이 외에 두 번이 더 있다. 한 번은 선조 때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치려 할 때 신하들이 양위를 조심스럽게 거론한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의 예는 고종 때로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이완용이 미쳐가지고 헤이그 밀사를 계획한 고종에게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한 적이 있다. 

선조와 고종의 예는 그나마 나라가 망하냐 마냐의 상태니까 그렇다 쳐도, 양정이 일을 벌였을 때는 세조의 권위가 확고했던 때다. 죽는 게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이런 양정의 예를 제외한다면 한명회, 신숙주와 같은 공신들은 세조가 죽을 때까지 우대받았다. 도중에 세조가 견제의 움직임을 잠시 보이기도 했으나 충분하지는 못했다. 결국 공신들은 세조에게 막대한 토지를 수여받고 정계에서도 핵심인사로 자리 잡아 훗날 훈구파라는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세조의 이런 모습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아끼는 도덕적인 면모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막대한 힘을 얻게 된 훈구파는 부패하는 수순을 밟으며 조선의 발전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인 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개인이 가정을 잘 꾸렸다든지, 검소한 삶을 살았다든지, 주변사람을 아꼈다든지 등의 장점이 있더라도 결국 그 평가는 더 넓은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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